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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홈런만 잘 치는 줄 알았더니

반짝이2 2009. 6. 7. 11:29

미국 클리브랜드에서 메이저리그 3할타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추신수 선수.

홈런만 잘 치는 줄 알았더니 개념도 있네요^^

아래글은 인터넷 일요신문에 연재되는 그의 '추추트레인 ML 일기'에서 퍼왔습니다. 

추추트레인 ML일기<7>

일요신문 | 입력 2009.06.04 11:31

지난 토요일이었습니다. 원정 경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아내가 전화를 했더라고요.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면서, 집 뒷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 뉴스로 나온다고 전했습니다.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에 접속해 보니까 아내의 말이 사실이더군요.

정치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 돌아가는 상황은 대충 알고 있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뇌물 수수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는 점도, 가족들이 모두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자살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 분을 떠나게 했을까요? 그 어떤 것이 그 분을 숨 쉬게 하지 못했을까요? 그날 밤 전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다음날 클리블랜드 구단관계자를 찾아갔습니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 어떤 형태로든 제 마음의 슬픔과 조의를 표하고자 유니폼에 검은색 리본을 달겠다고 말했더니 구단 측에선 메이저리그 규약을 거론하며 절대 안 된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모든 국민들이 비통함에 잠겨있는데 혼자서 방망이를 휘두르며 경기에 출장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저는 노 전 대통령과 어떤 인연도 없습니다. 그저 그 분의 소탈한 성격과 원칙을 중시하는 강직함, 그리고 국민들, 특히 가진 게 별로 없는 농촌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시는 모습은 저절로 그 분에 대한 존경심이 들게 했습니다. 세상엔 그 분이 받았다는 '그 돈'보다 더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나쁜 짓을 하고서도 두 다리 쭉 뻗고 잘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전에 전직 대통령들이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고 가족, 친척들이 모두 검찰에 불려갔어도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왜 노 전 대통령은 그걸 견디지 못하고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요?

오늘 방송을 보니까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치러진 경복궁과 시청앞 광장이 온통 노란색으로 뒤덮여 있더라고요. 자발적으로 노제에 참여한 시민들과 유족들의 눈물을 보면서 마음 한 곳이 아려왔습니다. 경찰차가 시청앞 광장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에선 지금이 2009년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곳의 한 방송사에서 진기하게 둘러싸고 있는 시청 앞 경찰차들을 보여주는데 어찌나 낯 뜨겁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참, 지난주에 메이저리그를 취재하는 한국 기자들에 대해 한마디하겠다고 한 것 기억하시나요? 요즘엔 한국 기자들 보는 게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특파원들이 없어요. 그런데도 제 기사는 계속 나오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모 신문사의 통신원이라는 여성 분이 절 찾아오셨습니다. 알고 보니 현지 유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야구에 대한 기본적인 룰이나 상식은 물론이거니와 메이저리그 라커룸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경기 후 절 만나러 오신 것까진 좋은데 절 찾기 위해 라커룸을 뒤지고 다니셨어요. 한 선수가 저한테 와선 '어떤 동양 여자가 추를 찾는다'고 귀띔해주더라고요. 결국 그분을 데리고 나와서 인터뷰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걸려오는 기자분들 전화는 모두 안 받습니다. 통신원도, 유학생도 좋은데 야구 담당 기자들이 직접 현장에 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상주하지 못한다면 한 번이라도 직접 와서 제가 하는 걸 지켜보고 기사를 써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경기에 출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조건 '몸에 이상이 있다'라고 추측성 기사를 쓰지 말고 저한테 직접 얘길 듣고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경제 상황이 좋아지면 절 인터뷰하러 오는 한국 기자분들도 많아지겠죠?

오늘(30일·한국시간) 프로그레시브필드서 열린 뉴욕 양키스와의 홈경기에서 전 선발에서 제외됐다가 6회 말 대타로 나섰습니다. 어느 분이 문자중계를 보다가 '추신수가 손가락 부상을 당했다'라고 썼나 봐요. 친구들이 전화를 해오더라고요.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오늘 선발에서 제외된 건 어제 경기가 끝난 후 웨지 감독님이 무조건 오늘은 쉬라고 했기 때문이에요. 매일 경기에 출장하다보니 제 컨디션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신 거죠. 경기장에도 12시에 오지 말고 4시 이후에 출근하라고 하시면서 만약 4시 전에 제 얼굴이 보이면 벌금을 내게 할 거라며 강경하게 말씀하셨어요. 경기 전 연습도 안 했고 라커룸에서 쉬다가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팀이 몰리니까 결국 6회에 대타로 나가게 하시더라고요. 비까지 내려 1시간 30분이나 경기가 지연됐고 결국 밤 12시 30분이 돼서야 경기가 끝났어요.

클리블랜드에는 4일 연속 비가 내렸습니다.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한국의 '그 분'을 떠올렸습니다. 편히 잠드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클리블랜드에서 추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