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경력 10년쯤 된 어느 중견배우를 만났는데,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그가 한 말이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처음 연극을 시작한 신인 배우 시절, 저는 독재적인 연출가에게 연기를 배웠습니다. 그는 연습 내내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욕설을 하고, 때로는 손찌검도 했습니다. 어느 여배우는 지시한 연기를 제대로 못한다고 발길에 배를 채이기도 했고, 어느 남자 배우는 연출이 던진 재떨이에 맞아 눈자위의 살이 찢어지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은 그가 시키는대로 움직일 뿐,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거나 연출의 지시에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불호령과 함께 배역을 그만 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연습장은 언제나 숨막히는 긴장과 폭발할 것 같은 불만 속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그 연출가 밑에서 몇 년 동안 극단 생활을 한 뒤, 다른 연출가의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출가는 정반대로 민주적인 연출가였습니다. 배우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하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연기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고함을 지르지도 않았고, 배우의 연기가 맘에 들지 않아도 매우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설명하며 격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연출 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기에 혼란이 생기고, 연출가의 그런 태도가 자신감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연출가를 무시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연기에 대한 긴장도 해이해졌습니다.
연기란 배우 자신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스스로 연기를 완성해 간다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저는 지금 독재적 연출가와 민주적 연출가 사이에서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의 고민을 들으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 배우와 흡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란 인간의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고, 내면은 스스로의 힘으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내부의 창조적 힘으로 스스로 굴러 갈 때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사회를 민주적으로 가꾸어 나가겠다는 욕구보다 강력한 지도자의 독재적 리더쉽에 의지하는 욕구가 더 크게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러한 욕구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됩니다.
때마침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하는 서울대학교 교수 일동' 124명이 6월 3일에 서울대 신양인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언문을 발표했군요.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또한 훼손되었다. 주요 방송사가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을 겪는가 하면, 국회에서 폭력사태까지 초래한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원만한 민주적 논의절차를 거쳤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야의 동의로 지난 3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출범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이 회의 공개나 국민여론 수렴을 반대함으로써 위원회는 표류하고 있다. 국민 다수가 언론법 처리 강행 방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흐름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다. 현직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건에서 보듯이, 현 정권은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상처를 입혔으며, 그에 따라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국 법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여론에 따라 일단 포기했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살리기'로 탈바꿈하여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북정책이 거둔 성과도 큰 위험에 처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목숨을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때 집회의 강제 해산과 노동자 대량연행과 구속으로 맞서는 일 또한 구시대적 대처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정치노선의 차이나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이다. 모든 국민의 삶을 넉넉히 포용하는 열린 정치를 구현하는 정부의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라고 밝힌 단체 회원 20여 명이 고성을 지르며 단상으로 몰려들고, 그 중 한 회원은 시국선언문을 찢어 바닥에 내팽개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소란으로 기자회견은 잠시 중단됐고, 학생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고성과 삿대질로 참가 교수들에게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울대에 이어서 중앙대 등 전국 각 대학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이어지고, 참여연대·한국여성단체연합·환경운동연합 등 30여개 시민·사회단체들도 시국모임을 갖고 입장을 발표했다고 하니 그러한 충돌과 혼란은 앞으로 더욱 뜨겁게 우리 사회를 달구어 나갈 듯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민주사회를 가꾸어 나가기 위해 "80년대의 뼈아픈 진통"을 또다시 겪고 있는 것 아닐까요?
'내 마음의 지도 > 세상밖으로-기사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소년들도 ‘시국선언’ (0) | 2009.06.07 |
---|---|
독재냐 민주주의냐 갈림길에 놓여 있다" (0) | 2009.06.06 |
꿈을 잃은 사회 꿈꾸지 못하는 아이들 (0) | 2009.06.01 |
초등학생들 꿈이 없다 (0) | 2009.06.01 |
스크랩-노무현의 죽음, 어느 아줌마의 깨달음 (0) | 2009.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