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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학습, 학습의 촛불

반짝이2 2009. 6. 18. 23:40

촛불의 학습, 학습의 촛불

손석춘칼럼(한겨레) 2009/06/17 11:33 손석춘

 

 

  • 촛불이 무섭기 때문일까, 우습기 때문일까. 민주시민 머리를 방패로 찍는 저들을 보라. 조폭조차 혀 찰 야만이다. 쫓기는 시민의 꼭뒤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친 전두환 일당과 겹쳐진다. 이명박 정권의 맨얼굴이다. 동영상을 본 젊은 여성은 구토증을 토로했다.

    비단 ‘살인 경찰’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국회의원 전여옥의 지지모임 회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차라리 자살을 하라고 살천스레 쏘아댄다. “바위에 올라갈 힘이 없으면 본인 집 옥상에서도 가능하다”고 언구럭 부린다.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자살 앞에서도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아무런 성찰이 없다. 용산 철거민과 화물연대 노동자의 핏빛 원혼은 지금 이 순간도 떠돌며 흐느끼고 있다.

    이 대통령과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촛불에서 학습한 게 있다면 오직 ‘초전박살’ 아닐까. 보라, 저 경찰과 검찰을. 게다가 부자신문들은 공권력의 폭력을 두남두는 수준을 넘어섰다. 강경대응을 선동한다. 폭력적 국가기구와 이데올로기 기구를 장악한 이명박 정권으로선 촛불을 시들방귀로 여길 만도 하다.

    그래서다. 촛불을 든 모든 민주시민에게 제안한다. 아니, 먼저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촛불에서 무엇을 학습했는가. 2008년 100회 넘게 타오른 촛불항쟁을 톺아볼 일이다. 서울 용산 철거민 5명과 화물연대 박종태의 원혼 앞에선 왜 활활 타오르지 않았을까.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다시 타오르긴 했다. 하지만 얼마나 타오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 스스로 지쳐 촛불 내리는 일을 더는 되풀이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촛불항쟁에서 우리는 이명박 정권에 맞설 대안이 또렷하지 않다는 사실을 학습했다. 정치적 대안이 없을 때 촛불은 다시 타올라도 숙지근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저 ‘괴물정권’은 왜 등장했는지를, 김대중-노무현 정권 내내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늘어가고 양극화가 깊어갔는지를, 왜 대한민국이 자살률 1위에 출산율 꼴찌 나라가 되었는지를, 꼼꼼하게 짚어야 한다.

    더러는 민중이 이해하기 어렵다며 ‘신자유주의’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금융 세계화를 밑절미로 기업규제 완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강행하는 게 바로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삶에 어떻게 폐해를 주는지 지식을 나누고 대책을 공유해가야 한다. 그래야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 그 지점에서 촛불을 통한 학습은 학습하는 촛불로 이어진다.

    노골적으로 상위 10퍼센트의 이익만을 좇는 이명박 정권의 정체를 낱낱이 밝히고 민중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구체화하는 과정 자체가 학습이다. 촛불을 든 민주시민 스스로 ‘학습하는 촛불’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좋고, 일터에서도 좋다. 10명 안팎의 학습 동아리를 자연스레 만들어 자신은 물론, 이웃의 정치의식을 싸목싸목 높여가야 옳다. 민중의 슬기가 희망이기 때문이다.

    학습하고 토론할 때, 연대하고 단결할 때, 민중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 스웨덴의 성숙한 민주주의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변혁도 그 밑절미엔 ‘민중 학습’이 자리잡고 있다.

    촛불을 밝히는 현장에 동참하는 학습만이 아니다. 우리가 실현하려는 사회를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는 촛불, 바로 그것이 어둠을 물리치는 민중의 길이다. 어깨에 힘 빼고 지역과 일터로 깊숙이 파고드는 길, 학습하는 촛불의 길이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으로 벅벅이 가는 길이다. 저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주는 길이다, 촛불의 무서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