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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쌍용차 굴뚝 편지

반짝이2 2009. 7. 1. 13:25

 

쌍용차 굴뚝편지(1)

 

목숨 건 고공농성 50일차 동지를 가슴에 새기자!!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 구사대에게

 

햇볕이 너무 뜨겁습니다.

굴뚝 위로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과 살을 태워버릴 것 같은 폭염이 굴뚝을 이글이글 타오르게 합니다. 굴뚝에 올라온 지 50일이 지났지만 굴뚝이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나고, 뜨거운 공기에 숨을 가누기가 벅찹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은 이 곳 굴뚝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참혹한 광경입니다.

얼마 전(23일) 아침이었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사제 방패로 무장하고 공장에 나타난 400여명의 용역경비들이 우리 조합원들과 가족들의 출입을 막고 폭력을 일삼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며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회사의 지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관리자들과 마지못해 끌려나온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들 2천여명이 버스 주차장에 모여, 천막과 컨테이너를 치고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하는 모습은 차마 눈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40여대가 넘는 경찰버스가 들어오고, 1,800여명의 전투경찰이 나타나자 “이제 곧 전쟁이 시작 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전쟁이 곧 시작되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다

 

용역경비들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돌아온 우리 조합원들과 가족들을 공장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연약한 우리 가족들이 절규했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거친 몸싸움 끝에 공장 안에 있던 선봉대 동지들이 밖으로 나가 용역경비들을 몰아내고서야 간신히 조합원과 가족들이 공장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70m 굴뚝 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너무 다급해서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동지들에게 긴급한 상황을 문자로 알리는 일, 잘 보이지도 않는 조금한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처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굴뚝

 

지난 세월이 떠오릅니다. 1999년 군대를 제대하고 평택에 올라와 구한 첫 직장은 자동차 정비소였습니다. 군대 가기 전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던 경험을 살려 2000년 쌍용차에 1년 정도 일을 하다, 여러 직장을 떠돌았고, 2003년 다시 쌍용자동차에 들어왔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제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차체를 용접하는 일이었습니다. 무쏘, 코란도, 로디우스, 렉스턴이 제 손을 거쳐 용접되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우디 국왕이 탔다는 무쏘를 시작으로 렉스턴까지 밤낮으로 일했지만,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비정규직의 월급으로는 제가 만든 차를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았습니다.


기술이 뛰어난 쌍용차가 중국 상하이자동차로 넘어가고, 2006년 상하이자본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정규직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파업을 했을 때 비정규직인 저와 동료들은 공장 밖에서 무심히 TV를 통해 이 소식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투쟁이 끝나고 600여명의 비정규직이 공장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저와 함께 일하던 형님들, 한솥밥을 먹던 동료, 후배들이 하루아침에 ‘끽’ 소리 한 번 하지 못하고 해고됐습니다. 그것도 노사 합의로 말입니다. 그 때 저는 살아남았지만 동료들을 지키지 못하고, 싸우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비정규직을 자르고 찾아온 평화는 2년을 넘지 못하고

 

그렇게 찾아온 공장의 평화는 채 2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작년 가을부터 공장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2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고,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금속노조에 가입해 ‘쌍용자동차비정규직지회’를 만들었습니다.

 

지난 해 10월 쌍용차 정규직 집행부는 또 다시 정규직 전환배치로 우리 비정규직 350여명의 동료들을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공장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우리는 강력히 항의하고 싸웠지만 동료들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집행부가 바뀌고, 비정규직의 목을 향해 내리치던 칼날은 이제 정규직을 향했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이 곳 70m 높이의 굴뚝에 정규직 동지들과 함께 있고, 아래에는 비정규직 동지들이 정규직과 함께 공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회사에 끌려나온 정규직 동지들께

 

오늘도 새벽부터 해고통지서를 받지 않은 2천여명의 관리직과 조합원들이 공장에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공장 전체를 봉쇄하고, 심지어 경찰까지 협박하며 진입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하고 따라하는 정규직 동지들이 망원경으로 보입니다.

 

소처럼 끌려나온 정규직 동지들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쌍용차를 고물 팔아치우듯 팔아먹은 건 정부와 사용자였습니다. 상하이자본에게 유린당하고, 기술을 도적질당한 것도 정부와 사용자였습니다.

 

쌍용차를 망가뜨리고, 수 천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한 저들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데 왜 또 다시 우리 노동자들이 해고되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아내와, 일곱 살짜리 우리 딸과 세 살박이 아들 녀석에게 아빠가 왜 공장에서 쫓겨나야 하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에 끌려나온 동지들, 쌍용차의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의 분노는 정부와 사용자들에게 향해야 합니다. 정규직 동지들이 자기가 살기 위해 비정규직을 잘라냈던 지난 시절의 잘못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우리가 같이 싸워야 합니다.

지난 2006년 동료들이 공장에서 쫓겨날 때 저는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보았습니다. 하지만 침묵과 굴종으로 선택한 노예의 삶은 2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저들이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게 쌍용자동차가 아닌 한국 노동자의 현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주말 야간 문화제가 열렸습니다.

엄마 아빠와 같이 하는 어린 아이들의 팔뚝질이 어른을 닮아가게 만드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드물겠지요. 쌍용자동차 자본의 '노-노 갈등' 전술로 인해 희생자를 둘이나 만들어 내고도 또 저들은 그저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녹음기처럼 틀어대고 있습니다.

 

시내에 있는 어느 스님이 쌀 500kg과 생수 50상자를 가져와서 “살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의 요구는 법보다 정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농민회에서 온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존재는 세상이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는 노동자이고, 사람이 먹을 것을 생산하는 농민”이라고 하셨습니다.

 

쌍용자동차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무직까지 우리 노동자 모두가 주인입니다. 해고통지서 따위로 우릴 갈라놓을 수는 없습니다. 구사대가 아닌 동지로,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동지들과 함께 싸워 승리하고 싶습니다.

아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고 싸워서, 아빠를 기다리는 우리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쌍용차 굴뚝편지(2)

 

 

대통령 품질상을 받은 노동자가 정치인들에게

 

기억하고 싫지 않은 일주일간의 전쟁이 끝나고

쌍용차를 이 지경으로 만든 자들이 뒤에 숨어 노동자의 손에 쇠파이프와 볼트, 소화기를 쥐어주고 동료의 뒤통수를 내리치라 했던, 끔찍한 전쟁이 멈추었습니다.

 

굴뚝 위 온도를 40도가 넘도록 뜨겁게 달구던 뙤약볕이 지나고 잇따라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지난 밤, 그 지난 밤 연이어 불어 닥친 비바람은, 50일이 넘어 구멍이 뚫리고 삭아버린 비닐을 뚫고 굴뚝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테이프를 붙이고 그 위에 또 붙여도 소용없었습니다. 새는 비를 포기하고, 우비를 입었더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비상식량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이었습니다.

주말까지 계속된 전쟁으로 며칠 동안 굴뚝 위에 식사가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이어 라면을 먹었더니 속에서 탈이 나버렸는지 계속 설사를 했습니다. 간밤에 잠을 계속 설쳤더니 졸음이 몰려옵니다.


참혹했던 60시간의 전쟁

전쟁은 참혹했습니다. 지난 6월 23일부터 용역깡패 500명과 구사대 2천명이 경찰병력의 호위 아래 공장을 밀고 들어오는 광경은 흡사 군사작전 같았습니다. 첫날은 공장의 울타리를 부수고, 둘째날은 바리케이트를 철거했습니다. 그리고 25일부터 2박3일 60시간의 끔찍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쇠파이프와 방패, 볼트와 소화기를 들고 공장으로 쳐들어온 용역깡패와 구사대는 곳곳에서 우리 조합원들을 공격해 왔습니다. 지게차를 밀고 들어와 소화기와 쇠파이프로 조합원의 뒤통수를 내리쳐 피가 흐르는 광경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끔찍했습니다.

 

곳곳에서 비명이 터졌고, 멀리서 가족들이 울부짖었지만 공격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밤과 낮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멈춘 시간은 식사시간 뿐이었습니다. 먼저 식사를 마친 저들은 뒤늦게 밥을 먹고 있는 우리 조합원들을 그대로 공격해 왔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해 구급차를 불렀지만 잔인한 저들은 구급차조차 공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굴뚝 위에서 그저 애타게 “죽으면 안 돼, 제발 죽지마”하며 혼잣말만 대뇌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서진 기계 내팽개쳐진 부품들

 

27일 밤 10시 “더 이상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터를 지켜낼 수 없다”며 ‘공권력 투입’을 요청하고 저들은 공장을 떠났습니다. 저들이 떠난 공장은 폭격을 맞은 듯 처참했습니다. 저들은 공장을 다시 가동하기 위해 보호하고 있었던 부품과 생산시설까지 부수고 나갔습니다.

 

부서진 부품과 기계들을 보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우리가 다시 들어가 일해야 할 공장이고, 우리가 조립해야 할 소중한 부품들을 부수고 짓밟을 수는 없었습니다. 노동자의 공장, 노동자의 기계가 용역깡패들에게는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겠지요.

 

저들은 공장만 초토화시킨 게 아니었습니다. 회사는 일 밖에 모르는 순진한 노동자들의 손에 쇠파이프와 볼트를 쥐어주고 수 십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향해 휘두르게 만들었습니다. 회사는 노동자들을 불구덩이 속에 내던짐으로써 인간성마저 초토화시켰습니다.

 

그렇게 피 말리는 60시간이 지나고 잠시의 평화가 찾아왔지만 마음은 불구덩이가 들어앉은 듯 좀체 진정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일주일 만에 가족들이 공장을 찾아왔습니다.

생사를 걱정하며 이틀 밤을 공장 앞에서 뜬눈으로 지샌 가족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남편을 만났습니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닦아주며 함박웃음을 짓는 모습에 저도 덩달아 눈물과 웃음이 뒤범벅이 됐습니다. 정문 앞에 와서 손을 흔드는 제 아내와 두 아이의 모습을 저는 망원경으로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7년 동안 월차 2개 쓰다

 

2003년 쌍용자동차에 입사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면서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지난 7년 동안 월차를 단 두 개밖에 쓰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용접 일을 시작해 쇠를 깎는 사상 조립 작업(그라인딩작업)까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쌍용차에서 보낸 7년의 세월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2005년 쌍용자동차 대표로 정규직과 함께 전국 품질분임조대회에 출전을 했던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통령 은상을 받았습니다. 지금 저희 집 거실에 자랑스럽게 놓여있는 메달을 보며, 아내는 아이들에게 아빠를 자랑하곤 합니다. 그렇게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노동과 기술력으로 만든 쌍용자동차였습니다.

 

1년에 월차 한 번 쓰지 않고, 대통령상까지 받은 기술로 무쏘, 코란도, 로디우스, 렉스턴 같은 자랑스런 차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쌍용자동차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산업은행 총재님, 그리고 높으신 장관님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은 상하이자동차에 2700억이나 빌려주면서 기술이전을 제한하는 약정을 없애버렸습니다. 상하이자동차는 10억 달러 투자약속은 물론 신차 개발 등 어떤 투자도 하지 않고, 핵심 기술을 빼낸 후 흑자회사를 빚덩이로 만들어 야밤 도주를 했습니다. 쌍용차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산업은행과 상하이자동차에서 누가 책임을 졌습니까?

 

민주당 정세균 대표님, 그리고 국회의원님들.

우리 노동자들이 그토록 반대했는데, 노무현 정부는 외자유치를 떠들면서 상하이자동차에 쌍용차를 고물 팔아치우듯 팔아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노동자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까? 왜 우리들이 임금을 못 받고, 왜 우리들이 해고되고, 왜 우리들이 잡혀가야 합니까?

 

왜 우리들의 죽음과 절규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오늘(7월 1일) 공장 정문과 후문에 전경버스 50여대에서 내린 경찰들이 공장을 에워싸고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용역깡패와 구사대가 떠나면서 요청했던 공권력 투입이 곧 시작될 것 같은 두려움이 또 다시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쌍용자동차에 투입해야 할 것은 공권력이 아니라 공적자금입니다. 특공대가 아니라 정부의 교섭대표가 쌍용자동차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쌍용자동차는 제2의 용산참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죄가 없는 우리 조합원들이 특공대와 전투경찰의 곤봉과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도록 제발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정부가 대화와 교섭에 나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70m 굴뚝 위에서 그 처절한 절규와 참혹한 살육을 지켜보지 않도록 간절하게 호소 드립니다.

 

(폄) 쌍용자동차 비정규직지회 ... http://cafe.daum.net/ssybj 

출처 : 나만의 창고
글쓴이 : 박 정근 원글보기
메모 : 이집 주인장 박정근님은 옥쇄농성장에서 나오자마자 수염 깎을 새도 없이 헌혈차에 헌헐하고, 밀린 숙제 한다고 수원법원 앞에서 신영철대법관퇴진 1인시위하러 가시는 분입니다. 저는 이분을 언소주 카페에서 알게 되었죠.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수화봉사하는, 진짜 노동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