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백년지대계/학교는 죽었다

‘무서운 중딩’들은 누가 만들었나

반짝이2 2010. 2. 14. 21:10

민족의 명절, 설이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이집저집 할 것없이 다들 살기 함들다는 얘기가 여느때보다 많이 들립니다.

다니는 직장에서 언제 그만 나오라 할지 무섭다는 얘기에서, 아이들 사교육비에 허리가 휜다는 얘기, 다가올 6.2 지자제 선거에 우리 동네는 어떤 놈(!)이 나온다더라 하는 얘기까지...

참, 살림살이 나아지기는커녕 살림살이 들어먹게 생긴 집들이 하나둘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 얘기들 끝에 제가 학교에 있답시고

얼마전 인터넷을 달군 알몽 중학생 졸업식 뒤풀이 얘기가 끼어 들면서

요즘 아이들 진짜 문제다, 결국은 말세론까지 나가는 바람에 제가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아이들 문제가 어디 아이들 문제겠냐고. 결국 어른들 문제이고 세상 문제가 아니겠느냐고.

그저께 오려둔 한겨레신문의 칼럼을 들이밀면서 한 번 읽어 보시라고들 했더니, 그제서야 고개를 끄떡이십니다.

 

게다가 학생을 폭행하고 수업시간에 성희롱, 폭언을 일삼은 대구교대 모교수 얘기까지 했더니

개명천지에 그런 일이 있냐고.

개명천지도 아니고 지금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너는 왜 맨날 그런 일에만 밝으냐(?)는 걱정 섞인 타박도 따라옵니다. 

신문방송에서 하도 전교조를 쥐잡듯하니 조심해라, 탈퇴해라는 충고까지.

 

우리 식구들에게 보여 주었던 한겨레신문 칼럼을 옮깁니다.

읽다가 눈물이 왈칵 나서 신문에 얼룩이 졌더랬습니다. 아이들 이런 모습, 저도 수없이 봤거든요.

명색이 선생인데 손쓸 수도 없이 망가져가는 아이들 모습에, 속수무책, 밤잠만 설치기도 했고요.

 

이 아이들이 자신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아갈 세상을 만드는 일,

우리 어른들의 몫이겠지요.

무심한 카메라에 잡힌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고해서 내반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가슴 쓸어내릴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도 내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귀중한 존재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더불어 이계삼 선생님이 쓰신 칼럼들을 모은 책도 소개할까 합니다.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녹생평론사)

제 곁에 계신 교사들과, 그리고 학부모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함께 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세상읽기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04483.html]

 

‘무서운 중딩’들의 시대 / 이계삼

한겨레 
»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밀가루를 뿌리고, 날계란을 던지고, 교복을 찢는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가 됐다. 보기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은 졸업식 날 저렇게라도 해방감을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간 받아온 억압에 대한 반감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네들끼리의 결속도, 그 무리 속에서의 자기 존재감도 그렇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아예 속옷 바람으로 거리를 누비며 뜀박질을 하고, 그 속옷까지 찢어발기는 거의 광기에 가까운 난동이 벌어진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주체들이 대개 중학생이라는 사실이다. 그저 한때의 유행으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가 않다. 이것은 졸업식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고, 초등학교에서도 저런 ‘싹수’가 보이는 아이들이 적지 않게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학교 현장에서는 이 ‘무서운 중딩’들에 대한 이야기가 제법 널리 퍼져 있다. 나 또한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실제로 목격한 일도 있다. 어느날 ‘생일빵’이랍시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버스정류장 표지판에다 한 여학생을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 묶어 놓고 도망가는 한 무리의 여학생들을 불러 야단을 친 적이 있다. 겨우 중학교 1~2학년이 될까말까한 아이들이었다. 젊은 여교사건 나이든 남교사건 가리지 않고 대거리를 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수업시간에 이 반 저 반 맘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다. 수업이 안 돼서 너무나 고통스럽고, 학교 가기가 두려워진다는 중학교 선생님들도 적지 않게 만났다. 어떻게 이야기를 걸어야 할지, 대화를 풀어나가야 할지 도무지 막막한 아이들의 세계가 지금 학교 현장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 이 아이들은 대체로 19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났고, 그 얼마 뒤에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87년 6월항쟁보다 97년 아이엠에프 사태가 우리 사회에 더욱 깊고 진한 선을 그어 놓았다고 생각한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들이 이때부터 생겨났고, 생계비용에 대비한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해야 했고, 많은 부모들이 이혼과 별거로 아이들을 홀로 키우거나 시골의 조부모님 댁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아이들이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학원과 인터넷, 텔레비전으로 보내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뛰어놀 수 없었고, ‘살아있는 세계’와 교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움터오르는 그 ‘정직한 에로스’는 억압되었고, 자폐적이고 파괴적인 놀음의 과정 속에서 ‘욕구와 충동의 덩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자라난 첫 세대가 지금 중학교를 졸업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부모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지난 10여년 사이에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가파른 곡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먹고살려고 몸부림치느라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뒤처지면 곧장 먹잇감이 되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했고, 그 학원에 다닐 비용을 대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했고,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이 악순환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졸업식 날, 팬티를 입고 거리를 질주하는 이 아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 사회를 향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이들은 지금 지난 10여년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질문에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때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