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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

반짝이2 2009. 5. 19. 08:56

어제 5월 17일은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의 2주기였다.

생의 모든 것이, 가실 때의 모습까지도 울컥하게 만드는 사람 - 권정생.

 

언젠가 권정생과 이오덕의 삼십여년 사귐에 대한 글을 읽고 운 적이 있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생각이 나서, 선생님에 대한 몇 몇 자료를 블로그에 올려본다.

 

1-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권정생 선생님 삶에 대한 짧은 영상

2-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이 주고 받았던 편지글을 통해 보는- 관계, 그 소중함.

3- 권정생 이오덕 두 사람을 만나게 했던, 권정생을 세상에 알렸던 첫 번째 소설 [강아지똥] 애니메이션.

4- 권정생 선생님 유서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이야기들이다.

 

1- 지식채널e에서 방영한 권정생 선생님 삶에 대한 짧은 영상

 <2007년 8월 6일. EBS 지식채널e - 正生>

 

 2- 권정생 이오덕 선생님이 주고 받았던 편지글을 통해 보는- 관계, 그 소중함.

 

2003년 8월 25일, 이오덕이 세상을 떠났다.

일체의 조문을 받지 말 것. 그것이 그의 유언이었다.
그의 마지막 부탁은 [권정생]의 시비를 하나 세워달라는 것...
그는 죽어서까지[권정생]을 곁에 두고 싶어했다.

두 사람의 30년간의 편지.
그것은 [이오덕]이 세상에 남겨 놓은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었다.
"소란 떨지말고 조용히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기에

빈소는 개방되지 않았고, 그의 가는 길을 먼발치에서 제자들이 지켜보았다.

이오덕... 그는 이제 여기 없다.
이오덕이 세상에 남기고 간 책은 82권.
테이프를 감아 쓴 만년필과 안경.
그토록 좋아했던 고흐의 복사화 몇 장. 오래된 손목시계...
그것이 그가 남긴 전부였지만 그의 진정한 유산은

한국의 아동문학이며 그 중심에 [권정생]이 있다.

한국의 체호프... 권정생.


이오덕이 떠나던 날.. 그는 하루종일 두문불출했다.
언젠가 그는 "이오덕이 있어 나는 살 수 있다"라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이오덕의 상가로 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홀로 이오덕을 보낸 것이다.

괴로움을 녹여내고 그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사람...[권정생]
그와 세상 사이에 놓인 길은 너무나 좁았고

그는 마치 세상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길을 따라 한 벗이 찾아왔다.

 

편지 1(권정생)

 

바람처럼 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일평생 처음으로 선생님 앞에서 마음놓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출생지가 남의 나라인 저는 여태껏 고향조차 없는 외톨박이로 살아왔습니다.
9살에 찾아온 고향이 왜 그렇게 정이 들지 않는지요.
늘 소외당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선생님을 알게 되어 이젠 외롭지 않습니다.

 

찾아간 이는 이오덕이었다.
이오덕이 생면부지 권정생을 찾아간 것은

한 편의 동화를 읽고난 직후였다.
조그만 기독교 잡지에 실렸던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 한 편.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듯 보이던 강아지 똥 한 줌이

긴 기다림 끝에 마침내 거름이 되어 민들레 꽃으로 피어난다는 이야기...

동화는 세상에 쓸모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동화는 이오덕을 감동 시켰다.

당시 이오덕의 나이는 40중반.
주목받는 아동문학가로 자리잡은 중견이었다.
이오덕은 75년 가을, 권정생을 찾아갔다.
[강아지 똥]이라는 동화 한 편이 그의 길을 재촉했다.
그 때 권정생은 회복이 어려운 결핵환자로 새벽마다 종을 치는 종지기였다.
그의 나이는 36살. 이오덕과는 12년 차이.
이오덕은 권정생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때 권정생의 첫인상을

<다만 동화를 쓰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이오덕은 산골초등학교 교사였고

두 사람의 삶은 아동문학 속에 만났고 30년간의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지 2(권정생)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떳떳함만 지녔다면 病身이어도 좋겠습니다.
양복을 입지 못해도 장가를 가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세 끼 보리밥만 먹고 살아도
나는 나는 종달새처럼 노래하겠습니다.

 

답장도 이어졌다.
12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이오덕은 권정생에게

한 번도 하대한 적이 없었다.
존경과 우정은 정중하고도 간절했다.

 

편지 3(이오덕)

 

산골에 있어도 할미꽃 한번 못보고

진달래꽃 한번 찾아가지 못하는 일과입니다.
산허리에 살구꽃 봉오리가 발갛게 부풀어 올라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걸 보고 눈물이 날 뻔했습니다.
괴로울 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해봅니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꼭 찾아가 뵙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써 주시기를 빕니다.
서울에서 원고료 온 것이 있기에 만원 부칩니다.
보태어 쓰시기 바랍니다.

 

이듬해인 73년

권정생은 이오덕의 신뢰에 화답이라도 하듯

[무명저고리와 엄마]라는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권정생은 여전히 가난한 종지기였다.
새벽마다 종을 치며 한 편, 한 편 동화를 써나갔다.
권정생이 글을 쓴다는 건 거의 사투에 가까웠다.
약도 듣지 않는다는 전신결핵.
그 몸으로 원고지 한 장을 쓰려면 열 번도 더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해야 했다.

 

편지 4(권정생)

 

10여 일동안 몸이 불편했습니다.
병원에 가보면 그저 영양섭취를 많이하라고 합니다.
쓸데없는 줄을 알면서도 일년에 한 두 차례는 병원에 갑니다.
종합진단, 투약, 심신안정... 밥맛이 통 없습니다.
남들에겐 보리밥도 잘 먹는다고 하지만

어머니가 무쳐 주시던 무생채 생각이 자꾸 납니다.
고사리 무침도, 산나물도 그리고 어느 해인가

살찐 닭을 잡아 찹쌀을 넣고 끓인 닭 곰국을

꼭 한 주발이라도 먹고 싶어요.
이게 살아있다는 증거인 가봐요.
선생님, 꼭 좋은 동화 쓰겠습니다.

 

권정생은 작품이 써지는 대로 이오덕한테 보냈다.
그러면 이오덕은 작품이 발표될 지면을 찾아다녔다.
권정생은 쓰고 이오덕은 발표하고...
그 때부터 둘의 역할은 그렇게 정해졌다.

 

편지 5(이오덕)

 

[아동문학협회]에서는 고려가 나오지 않으니

우선 다른 곳을 알아보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서울의 [소년조선]이나 [소년한국] 등과

그 밖의 아동잡지를 알아봤지만
60매 짜리는 실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구매일신문]에는 웬만하면 실어주겠지...

하면서 대구에 내려가 문예부를 찾아가 부탁했더니

거기서도 난색을 보입니다.
워낙 제가 무능해서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저 용서를 바라고 싶습니다.

 

편지 6(권정생)

 

저 때문에 너무 애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올해도 보리밥 먹고 고무신 신으면 너끈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요.
가난한 것이 오히려 편합니다.
며칠 전에 시내에 나가서 원고지 1000장을 사왔습니다.
죽기 전에 써야할 것을 어서 써야겠다고 자꾸 초조해집니다.
아까서부터 소쩍새가 자꾸 웁니다.

 

편지 7(이오덕)

 

동화 한 편 더 보내주시면 상경하는 길에

어느 잡지에나 싣게 되도록 하겠습니다.
권선생님의 작품집이 출판되도록 해야될 것인데...

며칠 밤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여러가지로 선생을 돕고 싶은데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 뜻대로 안됩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작품을 알리는데 왜 그토록 자신을 바쳤던가?
그것은 당시 아동문학의 대한 이오덕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오덕은 평생을 잘못된 아동문학과 싸운 사람이었다.

이오덕은 아이들이 직접 쓴 글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평생의 보물로 여겼던 아이들의 글과 그림들...
이오덕은 그걸 모아 책으로 엮어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아이들의 꾸밈없는 글이, 일기가

감동을 주고, 아름다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 사람이었다.

그는 작은 문집이 만들어질 때마다 일일이 읽어보고 장문의 감상문을 보냈다.
문집으로 봐줄 사람이 없을 만큼 초라한 글에, 그림에 하나 하나

비평과 칭찬을 담아 60매 정도 원고의 육필로 적어보낸

이오덕의 정성에 어떤 교사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이오덕은 `글이란 전문적이고 특별한 사람이 아름답고 특별한 이야기를
화려하고 예쁘게 만들어내는 것'이란 생각을..

'글이란 삶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삶의 이야기를

누구나가 쉽고 진솔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라는 것으로 바로잡아 놓았다.
글 쓰기의 주체가 전문인이 아니라 누구나 이며,
삶과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
그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라고 바로 잡은 것이다.

이오덕이 평생 강조해 온 것은 삶의 글이었다.
지식의 글이 아닌 삶의 글...
40대 어느날, 이오덕은 권정생에게서 그 희망을 봤고 평생 그 희망을 지켰다.

 

편지 8(이오덕)

 

남들이야 무슨 말을 하든 저는 선생님의 작품을

귀하고 값진 것으로 아끼고 싶습니다.
우편환으로 7천원 부쳐드립니다.
우선 급한 대로 양식과 연탄 같은 거 확보하십시오.
요즘 출판 사정이 악화된 것 같은데 어떻게 해서라도

선생님 책이 나오도록 해보겠습니다.
이 편지 써 두고 인편을 기다리다 안되어

오늘 전신환으로 돈을 부쳤습니다.
저는 또다시 전근이 되어 산골로 옮겨왔습니다.
춘양서 한 시간을 걸어 재를 오르고

산 등을 타고 걸어야 하는 벽촌입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불편이고 뭐고 너무 사치한 소립니다.
선생이 계신 안동에서 더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저도 선생님을 결코 잊지 않고 살아가려 합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책을 내기 위해 일요일마다 서울을 오갔다.
그는 마치 외판원이라도 된 것처럼

권정생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 다녔다.

 

편지 9(이오덕)

 

지금 청량리에서 밤차를 타고 내려가는 길입니다.
[계몽사]에 가니 전에 맡겨 놓았던 장편동화를

아직 검토도 못했다며 미안해 합니다.
아동책이 통 안나가서 일체 출판을 못하고 있다고 해서

원고를 도로 인수했습니다.
다시 어디 편지로라도 교섭해서 연재라도 할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일전에 [소년동화]에 가서 선생님의 동화 연재를 부탁했더니

8월쯤 가서 다시 이야기 해보자고 했습니다.
기별 오는대로 편지 하겠습니다.

 

마침내, 74년 첫 동화집 [강아지 똥]이 나왔다.
그 책으로 권정생은 <제1회 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책 출간은 권정생에게 얼마간의 여유를 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가난한 종지기였다.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고, 동화책 판매는 신통치 않았다.
권정생도 이오덕도 그런 건 개의치 않았다.

 

편지 10(이오덕)


백만 명의 독자보다 단 백 명의 가난한,

그러나 슬기로운 어린이가 읽어준다면
더 기쁘고 보람있는 일이지요.
부디 몸조심하고 글 너무 쓰지 말고 쉬세요.
선생은 좀 더 오래 살아야 합니다.

권정생의 동화집은 계속 나왔다.
가난한 무명작가와 중견 아동문학가가 만나 이루어낸 성과들이었다.
그렇게 권정생이란 작가는 세상에 나왔다.
권정생은 오두막에서 쓰기만 할 뿐

지면을 얻어 출판하게 하는 일은
이오덕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아가면서 한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권정생을 세심하게 챙겨준 이오덕.
한국아동문학에 대한 스스로 짐 지운 책임과 의무감, 그것이었다.
그는 권정생만이 아동문학의 희망이라고 봤고

그걸 지키는 일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오덕이 권정생을 최고의 작가로 여긴 건

그가 바로 삶의 글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권정생은 직접 겪은 이야기를 작품으로 바꾸어 썼을 뿐

일부러 만들어 쓰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통해

우리 현대사를 아프게 겪어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

[슬픈 나막신]에서 권정생은 자신의 유년시절을 담았다.
권정생은 도쿄 변두리 민가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이주민의 삶은 처참했고 그 때의 기억은 평생 권정생을 따라다녔다.


편지 11(권정생)

 

우리 집은 아버지가 주어놓은 쓰레기가

뒤란의 처마밑에 꽉꽉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 퀴퀴한 곰팡내는 아직도 내 코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동경 거리를 쓰는 청소부 아버지.
열두 살짜리 누나도 공장에 나갔다고 했습니다.
집안은 언제나 비어 있었습니다.
몸서리 쳐지도록 무섭고 지루하고 쓸쓸했던 나날이었습니다.
전쟁에 시달리던 그 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땀이 흐릅니다.

 

권정생은 해방 이듬해 귀국한다.
9살이었고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다.
결핵의 증세가 시작된 건 19살.
가난이 병을 키웠고 제 때 치료하지 못한 결핵은

평생 그를 따라다니는 천형이 되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그러한 삶이 불행했던

우리의 현대사 그 자체라고 봤다.

 

편지 12(이오덕)

 

혹 자신의 체험을 그대로 쓰는 수기 같은 걸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이 말은 선생님이 동화작가로 적당치 않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선생님이 살아온 역사는 세상 사람에게 알리는 보람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보고문학이나 자서전이란 것이 훌륭한 문학작품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화를 쓰시는 것이 선생의 본 길이고 다만 그것에 전념하기 위해
남은 생명을 바치시는 선생님인데 행여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았는지 죄송합니다.

 

권정생은 [몽실 언니]로 화답했다.
[몽실 언니]는 불행한 현대사를 관통해 온 그 자신의 삶이었다.
몽실은 우리가 덮어두었던 아픔의 기억들을 모조리 끄집어 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도망가는 어머니.
의붓아버지 밑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몽실이.
몽실이는 절름발이가 된 채 쫓겨나고 만다.
가난해서 오직 가난해서 벌어진 모든 일...
전쟁터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들이고 배다른 동생이 태어난다.
얼마 후, 새엄마마저 숨을 거둔다.
몽실은 식모살이를 하며 동생을 거둬 먹이고 아버지는 머슴살이를 떠나있다.
그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몽실의 삶은 위태롭게 진행된다.
친엄마마저 세상을 뜬다. 의붓아버지에게서 생겨난 동생까지 이제 몽실의 몫이다.
병든 아버지를 고치기 위해 자선병원을 찾지만

돈 있는 사람에게 밀려 거리에서 숨을 거둔다.
도무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삶.
그래도 몽실은 살아야 한다고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몽실은 그렇게 가장 전형적인 몽실의 삶을 산다.

원고를 쓰는 내내 권정생은 고통스러워했다.
몽실의 삶은 기억하기도 싫은 그 자신의 삶이기도 했다.

 

편지13(권정생)

 

이틀간 가까스로 원고 20장을 썼습니다.
이야기가 비참해서 쓰기가 고통스럽습니다.
비록 아동소설이지만 육이오의 참상을 가볍게 다를 수 없습니다.
지금 몹시 머리가 아픕니다.

 

편지 14(이오덕)

 

선생님께서 장편을 쓰신다니 좋으면서도 저는 건강이 무척 걱정됩니다.
여긴 어제 아침에 벌써 된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꽤 얼었습니다.
그 허술한 방에서 무더운 여름을 나게 하고  

또 겨울을 보내게 해서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사람같이 않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집니다.
가보지 못해 늘 괴롭습니다.

 

그러나 정작 권정생을 괴롭힌 건 따로 있었다.
몽실이가 인민군 청년을 만나

통일이 되면 편지하자고 약속하던 장면. 그 장면은 삭제되어 버렸다.
시대는 폭력의 시대, 바야흐로 제5공화국이었고 두 사람은 용공주의자로 몰렸다.
그러나 몽실언니의 생명력은 그 어떤 폭력보다 강했다.
몽실언니는 재판을 거듭하며 이제 한국아동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권정생의 동화에 대해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이들은 또 있었다.
그의 동화가 아이들에게 읽히기에 너무 슬프고 아프고 어둡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정생과 이오덕은 아이들이 정직한 삶의 이야기를

동심주의적으로 오해할 리 없고, 아이들도 역사속의 실제 상황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 아픔을 의도적으로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편지15(권정생)

 

제 동화가 어둡다고 말하는 분이 있지만 저는 결코

제가 겪어보지 않은 꿈같은 이야기는 쓸 수가 없습니다.
쓰려고 노력하지도 않겠습니다.
전 앞으로도 슬픈 동화만 쓰겠습니다.
눈물이 없다면 이 세상 살아갈 가치가 없습니다.
산다는 건 눈물 투성이 입니다.
인간은 한순간도 죄 짓지 않고는 살 수 없는데

어떻게 행복하고 즐거울 수만 있겠습니까...!
결국, 울 수밖에 없습니다.
울 수 없다면 죽어야죠.


이오덕은 묵묵히 권정생의 글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발표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다.
주말마다 서울을 오가는 것도 여전했다.


 
편지 16(이오덕)

 

저 지금 상경하는 길에 우체국에 잠시 들렀습니다.
서울가면 다시 선생님 동화집 내도록 해놓고 오겠습니다.
지금 그것 때문에 가는 겁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 사랑하는 마음, 사랑의 방법이

헛된 꿈을 부풀리게 하지 않고 정말 사람으로 살아가는

원칙과 순수함을 키워주는 일에 두 사람의 뜻이 맞았다.
이오덕은 아이들을 믿었다.
아이들은 정직한 글을 알아볼 것이고 그는 그런 글을 읽히고 싶어했다.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아프면 아픈 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삶을 되돌아보며 거기서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는 글...
아동문학도 그렇고 모든 글이 그래야 한다고 이오덕은 생각했다.

 

편지 17(이오덕)

 

거기 일죽교회는 햇빛이 앉을 곳도 없는데 얼마나 춥습니까?
추위가 닥쳐왔는데 어떻게 지내실 지 걱정입니다.
걱정만 하고 가보지 못하니 저 같은 사람은 아무 쓸 데도 없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이 더 악화한 것 같은데 좀 자세히 알려줄 수 없습니까?
혹 경제적인 사정은 아닌지 좀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몹시 걱정입니다.
약을 계속 잡수셔야 할 텐데 어디 돈을 빌려서라도

약을 잡수시면 제가 가서 갚겠습니다.
고기 같은 걸 좀 사셔서 억지로라도 잡숫기 바랍니다.

 

편지 18(권정생)

 

3일 동안 열에 시달려 누워있었습니다.
열이 오르면 음식맛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아래 가게에 가서

새끼명태 100원어치 사왔습니다.
밥이든 죽이든 넘어가는 데까지 삼키고 나면

이제 살았다 싶습니다.
달력에 표시된 것을 보니 꼭 16일

밤낮을 고통스럽게 보냈습니다.
얼마나 심했는지 정말 삶이 두려워집니다.
이불을 한아름 껴안고 뒹굴었다가

벽을 손톱으로 바득바득 긁었다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가기도 하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마당을 서성 거리다
다시 들어와 쓰러지고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세상이 흔들려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또 살아났습니다.
그 속에서도 일상적인 저의 일은 해왔습니다.
새벽종을 단 하루 놓쳤을 뿐입니다.

 

이오덕은 어떻게 해서든지 권정생을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고 싶어했다.

 

편지 19(이오덕)

 

다음해쯤 제가 전근이 되면 여기 있는 곳보다는

괜찮을 것 같으니까 저 있는 곳에 계시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이 겨울만 견디어 주십시오.
약은 복용하고 계신지... 돈이 필요하면 편지로 말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오덕은 아들이 집을 짓자 권정생을 그 집으로 오도록 했다.
그러나 권정생은 오래 못 견디었다.
권정생은 아파도 혼자 아파야 하는 사람이었다.
권정생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의 고통과 고독에 철저히 몰입했다.
그런 몰입이 역설적으로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등도 따시고 배도 부른데 가슴이 빈 것 같다는 그를 이오덕은 결국
원래의 그의 자리로 되돌려 보내야 했고 권정생은 지금 그의 거처를 지었다.

 

편지 20(권정생)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습니다.
이발을 꼭 한 달 반만에 한 것 같습니다.
싹싹 깎아버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옷도 겉옷 속옷 따로 없이 하나만 입고

음식도 하루 세 끼는 너무 많습니다.
한 끼만으로 살 수 있게, 그러고는

잠들지 말고 오래 오래 앉아있고 싶습니다.

 

수식하지 않은 글인데 육박하는 감동을 자아내는 권정생의 글.
위태로운 건강, 그래서 그는 늘 이것이 마지막 글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그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다.
그러나 거기엔 세상을 꿰뚫어 보는 명징함이 있다.

자신이 가는 길에 의심하지 않고 철저히 몰입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에서 이오덕과 권정생은 닮은 꼴이었다.
이오덕... 그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국어가 훼손되는 건 이오덕에게 고통이었다.
훼손된 글을 아이들이 읽는 것 더 큰 고통이었다.
이오덕은 혼자 싸우고 혼자 애태웠다.

허례가 없는 정갈한 글...

이오덕은 권정생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오덕은 권정생의 동화를 아이들에게

교과서처럼 읽게 하고 싶어했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제 권정생의 동화는 아이들 교과서에 실려 아이들은

권정생의 동화로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고

이오덕의 교습법에 따라 글쓰기를 배운다.
이오덕과 권정생은 그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솔직하게 쓴 글이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
어린 제자들에게 두 스승은 그것을 알려줬다.
한국의 아동문학... 더도, 덜도 말고 두 사람으로 충분했다.

 

이오덕이 가던 날...
권정생은 끝내 오지 않았다.
장례를 조용히 치르라는 이오덕의 말을 따른 권정생...
언젠가 권정생은 이오덕에게 말했다.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여태껏 살아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한 사람에게 삶의 이유를 안겨줬던 사람... 그 사람이 떠난다.
한 사람으로 부터 삶의 이유를 확인했던 사람...
그는 그 사람과의 이별식을 홀로 치렀다.
평생을 모국어를 지키는 고단한 싸움을 자청했던 사람.
이제 그가 흙으로 돌아간다.
모국어가 바로잡히는 날이 오면 농사를 짓고 싶다던 사람.
스승을 잃은 제자들은 서럽게 울었다.
이제 더 이상은 호통도 그의 칭찬도 들을 수 없다.
비는 점점 거세어졌고 권정생의 집에선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오덕... 그의 죽음은 평온했다.
선고를 받는 순간에도 그의 평온은 깨지지 않았다.

 

새 한 마리 /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 아기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 날아가는구나!

 

아들이 그의 시비 하나를 세웠다.
평화롭던  죽음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오덕의 원대로 그 맞은 편에 권정생의 시비도 세워졌다.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

밭 한 뙈기 / 논 한 뙈기 /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 온 우주 모든 것이 /

한사람의 /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

이 세상 / 모든 것은 /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 돌멩이 하나라도 /

그건 '내'것이 아니다 / 온세상 모두의 것이다.

 


마지막 편지(이오덕)

 

괴로운 일 슬픈 일들이 많아도 하늘 보고 살아갑시다.
부디 살기 위한 싸움을 계속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오덕이 권정생에게 보낸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권정생의 편지가 [어린이 문학협의회]에 도착했다.


마지막 편지(권정생)

 

선생님 가신 곳은 어떤 곳인지...
거기서도 산길을 걷고 냇물 돌다리를 건너고
포플러 나무가 서 있는 먼지 나는 신작로 길을

걸어 걸어 씩씩하게 살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직 이승에 남아 있는 우리들은
선생님이 남기신 골치 아픈 책들을 알뜰히 살피며
눈물나는 세상 힘겹게 견디며 살 것입니다.

 

<편지글 :  http://blog.naver.com/prismc에서 펌>

 

3- 권정생 이오덕 두 사람을 만나게 했던, 권정생을 세상에 알렸던 첫 번째 소설 [강아지똥] 애니메이션.

 

 

4- 권정생 선생님 유서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드립니다.....3월 12일부터 갑자기 공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날에도 가끔 피고름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 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권정생(녹색평론, 2007년 7,8월호)

출처 : 함성이 기적으로 올 때까지
글쓴이 : 함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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