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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북한의 인공위성, 과연 질타만 할 일인가?

반짝이2 2009. 4. 8. 12:16
북한의 인공위성, 과연 질타만 할 일인가?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우리는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반대하는가?



우선 원칙적인 논리만 생각해보자. 어떤 과학기술도 군사적 전용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는 없다.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식량조차 군사적 전용 가능성의 논란거리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인간도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없는 경우 또한 없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난민행렬조차 '인간방패' 운운으로 공격당하는 비극에 처하는 것이 전쟁의 현실이다.

그와 반대로 어떤 군사기술도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미국의 군사 과학기술이 개발해 낸 인터넷은 그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와 동시에 어떤 군사적 인적 자원도 평화적 이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재난이 일어나면 병사들이 인명구조와 복구 작업에 나서는 것도 바로 그런 경우다.

그러나 아무리 의도와 상황에 따른 평화적 가치의 창출이 가능해진다 해도 무기체제 자체의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살상력과 이 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을 비롯해서 이를 둘러싼 하부구조는 평화적 가치의 발전을 기본적으로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편의 무장체제는 다른 한편의 무장체제를 강화시키는 조건이 되는 것은 군사력 경쟁체제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강력한 무장체제의 가능성 내지 잠재력의 진전에 대해서는 인류평화를 위해 보편적 통제가 요구된다. 그것은 강대국이냐 약소국이냐를 떠나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이상적 규범이다.

강대국의 무기는 괜찮고 약소국의 무기는 문제가 된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약소국의 무장력 강화는 정당 방위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반면, 강대국의 무장체제는 공격적 성격을 보다 강하게 가지고 있으니 곤란하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장체제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고강도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핵무기의 확산이 저지되어야 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강대국의 무장력 강화는 정당시 되는 반면, 강대국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약소국의 무장력만 일방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이다. 이 비난이 타당하려면 강대국의 무장력 또한 보편적 통제 아래 놓여야 하며 강대국의 패권체제가 국제적 민주주의의 기초 위에서 평화체제로 전환되는 변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전제가 서지 않는 한, 약소국의 무장력 강화는 모든 주권국가의 자기방어 권리에 속하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문제 삼기 어렵다.

역사적으로 이미 검증된 바 있듯이 강대국의 과학기술은 거의 언제나 대량살상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장래의 군사적 전용가능성이 아니라 이미 군사적 적용을 한 과거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는 강대국이 되는 조건의 하나였다. 그렇지 않은 나라 가운데 이른바 강대국이라고 불린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

강대국의 군사적 위상을 결정짓는 요소에 따른 시대구분을 해보자면, 19세기가 함대의 시대였고 20세기는 공군력과 미사일의 시대였다. 21세기는 전 지구적 통신과 정보시스템을 비롯해서 이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 배치의 능력을 갖는 우주기술의 선도적 기능의 확보여부에 따라 강대국의 군사적 지위가 결정된다. 미국이 우주항공국 NASA를 중심으로 우주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배경에는 군사적 가치에 대한 국가적 선택이 작동하고 있다.

약소국의 과학기술도 군사적 전용을 통해 인명살상의 가능성을 지닌다. 정치적으로도 무장체제 강화의 과정에서 힘을 갖게 되는 군부의 패권은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약소국의 과학기술이 군사적 전용의 단계를 밟는 것은 주권국가의 국방체제 정비라는 기본적 목표 말고도 지난 시기의 식민지배 경험과 현재적 시점에서 국제정세의 열세에 따른 방어용 성격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보편적이다.

하지만 약소국은 그런 능력을 독자적으로 갖는 것이 강대국에 의해 봉쇄되거나 통제되고 있는 것이 또한 국제적 현실이다. 강대국의 군사무기를 수입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그 자신이 제조하는 것은 진압과 견제의 대상이 되고 만다. 한국의 미사일 개발 제한이 존재하는 것도 그러한 보기다. 약소국의 은밀한 독자무기 개발의지가 발동하는 것은 이런 현실에서 이상하지 않다. 우리의 경우,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했던 시기와 오늘날 미사일 개발 제한 해제요구가 있는 것도 그 보기이다.

우주기술과 관련한 역사를 간략히 돌아보면 1957년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는 미국이 구소련의 과학기술에 밀린 사건이다. 이는 냉전 시기 우주기술 경쟁이 시작된 출발이었으며, 그 다음해인 1958년 미국에 이어 1965년 프랑스, 1970년 일본과 중국, 1971년 영국, 1980년 인도, 1988년 이스라엘, 그리고 2009년 이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인공위성 발사역사의 기점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자면, 40년 전의 일본이 인공위성을 발사했을 때 그것은 일본의 선진국 위상을 돋보이게 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그 시기 일본은 전쟁이 종료되었어도 태평양 전쟁의 전범 국가체제 청산이 미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일본이 오늘날 어떤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는 깊이 주목되는 바이다. 애국심 강조와 교육 관련법 개정을 통해 평화헌법 제9조 폐기를 지속적으로 전개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나라의 무장력은 지금 어느 수준인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편, 인공위성은 문제가 없고 미사일은 문제가 있다는 논리도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 인공위성도 군사적 목적을 가진 인공위성이 있고 발사시험에만 그치는 미사일이나 소지하고 있는 미사일보다 더 강력한 군사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움직임을 손바닥에 놓고 파악하는 것만큼 군사적 가치를 지니는 도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인공위성은 기후변화, 바다 수면 조사, 우주관측, 지구적 규모의 통신, 지상 이동물체의 네비게이션 기능, 우주공간에서의 생물체 실험, 지도 작성 등 여러 가지 인류생활의 발전을 위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인공위성의 개발은 우리 자신도 치열하게 하고 있고 우주시장의 미래를 내다보고 국제적 경쟁 상태에 진입하고 있는 형편이다. 군사적 전용가능성을 폭넓게 가지고 있다 해도 우주기술의 산업적 가치는 무한한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인공위성 기술이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그걸 우주궤도에 진입시킬 발사능력이 없거나 또는 개발체제의 발전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에서 대리발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에 놓여 있다. 대리발사에 드는 비용이 쌓이면 독자발사체 개발의 비용을 넘어설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장차 어떤 선택이 요구되는지는 장기적 고려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대리발사는 기술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우리의 인공위성 기술과 대리발사 작업을 하는 나라의 발사능력이 결합된 결과다. 이는 인공위성 기술과 발사기술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예다. 이 두 기술의 독자적 결합이 가능하다면 우리도 우주기술 개발의 목표를 향해 국가적 역량의 일부를 쏟아놓을 수 있다. 아니라면, 양자보완의 비용이 낮고 기술적 신뢰도가 가장 높은 경우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통일된 상황을 상정하면, 남과 북은 이 분야에서 어떤 과학기술의 미래를 펼치게 될까? 이를 바라보게 될 주변국가의 시선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우주기술의 산업화는 그에 든 비용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가져 온다. 대기권을 통과하는 소재개발은 재료공학의 발전을 비약적으로 가져오고, 우주통신의 기술을 비롯해서 원거리 자동화시스템 등 실생활의 첨단 기술 적용의 규모와 수준은 상상을 넘는다. 엔진개발의 수준은 자동차 산업을 비롯한 전 분야에 걸쳐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렇지 않아도 국제적 경제력의 경쟁체제가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걸 그대로 방치할 나라가 과연 몇 나라가 될까?

군사적 전용가능성이 있는 기술을 각도와 목표를 달리해서 평화적 이용으로 전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론 언제든 그것은 군사적 가치를 지닌 무기로 바뀔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방향으로 사태가 굴러가는 것을 막는 것은 매우 긴요한 일이다. 이 전제를 세우지 않고 진행되는 과학기술의 무한정 방임은 인류의 미래에 중대한 위협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전환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국제적 상황이 평화체제를 지향 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은 오랜 세월 전쟁당사자국가들이었다. 이들이 지닌 과학기술은 언제라도 상대를 공격하는 군사능력이 되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세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평화를 유지하는 국제현실의 체제적 변화가 역사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무장력은 집단안보체제의 하부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상대를 겨냥하는 공격형 무장력으로서의 기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구조다. 이를 토대로 해서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의 실체가 더욱 확장되도록 하는 것은 인류의 장래에 크게 도움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군사적 전용가능성을 지닌 과학기술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권리는 어떤 국제적 규제에도 저촉되지 않는다. 그것은 도리어 지향해야 할 바다. 당연히 군사적 전용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과학기술의 원천적 봉쇄는 강대국의 기술독점과 군사능력의 항구적 우위를 유지하겠다는 논리 외에 다름이 아니다. 약소국의 경우, 과학기술의 군사적 전용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군사적 긴장을 주도적으로 촉발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강대국의 역사에 희생당한 경험을 자신이 타자를 대상으로 되풀이 하려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이행은 군사적 사건이기도 했다. 철기를 주도한 세력이 군사적 지배자가 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철기시대의 도래는 인류문명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대의 최고 수준의 고열기술을 확보해서 철기제조를 하는 능력은 그 시기의 첨단기술이자 군사적 역량이었다. 우주기술의 개발 역시 군사적 사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주기술의 평화적 활용은 오늘날 우리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과학의 열매가 된 것도 현실이다.

그렇다면 묻자. 우리는 군사적 전용 가능성을 가진 과학기술의 평화적 이용을 반대하고 있는가? 또는 그 평화적 이용 가능성을 촉진하기 위한 국제적 평화체제 건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가?

발사체의 정체가 그토록 문제가 되더니 발사한 이후에는 북한의 인공위성이 궤도진입에 성공 했는가 아닌가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발사하는 순간, 그것이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 당장에 파악되는 것을 놓고 미사일이라고 그토록 우기고 그러다가 단지 "로켓 발사"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더니 이후에도 군사적 측면만 잔뜩 부각시키는 자세는 우리 자신의 인공위성 개발과 발사체를 비롯한 우주기술 확보를 가로막는 자충수다. 그에 더하여 한반도 평화체제의 미래를 고심하기보다는 일본의 군사대국화 과정을 부추기는 역사적 어리석음의 반복에 불과해진다.

물론 인공위성 발사기술의 군사적 전용의 가능성이 가져올 폭풍은 가히 가공할 정도라는 점에서 여전히 안보적 측면의 대비와 국제적 상황의 보편적 제동의 구축이 필요한 사안이다. 그와 함께 이러한 과학기술의 군사적 전용이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상황 자체를 해소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강대국의 군사적 압박의 위협에 놓여 있다고 받아들이는 약소국의 입장이 해결되지 못하는 한 이 문제의 돌파구는 본질적으로 생겨나기 어렵다. 국제적 제재나 압박의 방식은 상호 무장력 강화의 길을 넓혀갈 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군사적 위협이라는 측면만 과도하게 부각시켜 바라본다면 이와 관련된 전체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를 포괄적 수준에서 조명하지 않는 한, 우리가 정작 물어야 할 바는 어디론가 실종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과학기술 발전의 국제적 구조와 주권국가로서의 권리, 그리고 평화체제의 미래도 포함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