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지도/가끔 쓰는 일기

참교육의 꽃 ,김수경 열사

반짝이2 2009. 6. 7. 05:15

어제, 아니 그제 5일은 김수경 열사의 19주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년을 눈 앞에 이고 있으니 세월 빠르단 어른들 말씀이 그르지 않다.

 

살아있었더라면 서른 여덟,

남들 같았으면 좋은 짝 만나 결혼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도 두었을 나이.

 

그러나 사진 속의 김수경열사는 푸른 10대,

그를 잊지 못하는 선후배들이 세월과 더불어 나이 들어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만 푸르다.

 

 

< 김수경 열사 -  90년 당시, 대구 경화여고 3학년 학생회 총무부장이던 김수경 열사는 전교조 가입 교사에 대해 징계가 내려지자, 반대 시위를 10여 차례 주도하다 학교 측으로부터 문제학생으로 분류되고 교사들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이에 항거하여 ‘(전교조 옹호활동)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학교 다니기가 불편하다면, 아니 고통스럽다면 이미 그곳은 학교가 아닙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영남대 인문관 옥상에서 투신했다 >

 

어제는 20여년이 지나도 그를 잊지 못하는 선후배들이 그가 있는 현대공원에서 추모식을 지냈을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너무나 일찍 깄지만

차마 그를 땅에 묻지 못하고 가슴에 묻은 많은 이들이

그이들 손으로 세운 추모비 앞에서

속깊은 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2009년 6월,

19년전 그가 생을 마감했던 영남대 인문대 뜰 앞은 여전히 무심하였다.

 

그리고 다시,

20년전이나 다를 바없는 교육현실은

여전히 수많은 수경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하루에 제 목숨을 끊는 아이들이 평균 두명...

얼마나 더 많은 수경이들이 죽어야

그가 살아 돌아올 것인가.

 

오늘,

또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초대 범민련의장을 지내신 강희남 목사님께서 스스로 목을 매셨다 한다.

자살을 죄라 치는 기독교의 목사님께서.

 

MB반대와 대북정책 기조 전환을 요구하며

지난달부터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셨더라는데

나는 어째 알지도 못하였던지.

 

연로하신 분이 세차례나 옥고를 치르시고도 모자라

당신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치고 가신다 하셨다.

 

내놓아야할, 죽어야할 놈들은 버젓이 살아

온갖 행패를 부리고 있는데

구순을 앞둔 목사님께서 오히려 목숨을 내놓으셨다.

 

                                     

목사님께서 돌아가시기전, 마지막 참석하신 회의는

6일 서울에서 열린 6.10관련 시국회의.

 

그 6.10 이 3일 남았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들이 답할 차례이다.

3일 후에,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래동안

너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강희남 목사님께

수경이에게

그리고 박종태 열사께....